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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버스

이름

I

장 위대한 유산은 이름이었다. 신화보다 오래된 옛 신들의 지식이 꿈꾸는 자들의 이름에 스며들었고 마법이 깃든 이름은 인간의 핏줄에 기생하여 수 세대를 살았다. 옛 신과 함께 꿈꾼 자들의 오만과 그로 인한 타락의 진위를 가려낼 지혜가 옅어진 시대가 도래하자 이름은 마침내 권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름들을 한데 묶어 알투스라 불렀다.

 

연안도시 카리누스는 뿔 달린 거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옛 국토를 마주 보는 곳에 있었다. 세헤론에서는 산발적이고 소모적인 전투가 수백 년간 이어졌다. 국토를 수복하려는 애국자는 야만인을 혐오하여 거인의 피를 갈망했고, 허상을 두려워하는 거인은 마법사의 머리를 착실히 모았다. 대륙과 섬 사이를 가로지르는 물길 뒤에서 질서 없는 섬을 차분히 관망하는 알투스가 있었다. 숭고한 시대부터 명성을 드높인 파부스 가였다.

 

파부스 가는 외아들을 두었다. 가문의 수장은 갓 태어난 아기의 맥박 속에서 영계의 신호를 들었다. 오직 단 하나, 희귀성이라는 양념을 치자 훗날 집정관이 될 완벽한 대가 눈앞에 보였다. 할워드는 구전된 신화 속 왕자의 이름을 따 그의 아들에게 도리안 파부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리안에게도 이름은 중요했다. 그것은 목에 건 생득권이 보증하는 이름이 아니라 창조주의 축복이라 말하는 글자였다. 하룻밤을 꼬박 열에 취해 보내면 몸의 어느 한 부분에 생기는 글자는 운명의 상대를 가리켰다. 이를 두고 테다스 대부분의 사람은 창조주의 축복이라 말했다. 물론 알투스는 그 대부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이 원하는 이름을 물려받았고 필요하다면 그들이 직접 선택했다. 마법사 무리가 지나간 자리에 암흑이 물들었듯 창조주의 축복도 그들이 손을 대면 추한 흉으로 탈바꿈하였다.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가장 쉽게 털어버린 가치는 사랑이었다.

 

도리안은 달랐다. 귀한 이름을 물려받았음에도 이름을 기다렸다. 그와 가까운 누군가가 들었다면 조소했을 꿈도 꾸었다. 영혼의 짝과 영원히 사랑을 나눴다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꿈이었다. 상급생과의 결투에서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아홉 살에 서클에서 쫓겨났을 때도, 그 후 여러 서클을 돌아다니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엘프 슬럼가로 굴러떨어졌을 때도, 시궁창에서 그를 꺼내 겨우 부모님의 눈높이만큼 설 수 있도록 붙잡아준 은인이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할 때도 도리안은 한밤중에 열이 찾아오길 간절히 기다렸다.

 

어둠의 피조물의 공격으로 아내를 잃은 스승은 그의 아들 또한 피조물의 오염으로 인해 점차 생기를 잃어가자 절박해지기 시작했다. 절박한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는 간사한 유혹이었다. 기어코 스승의 입에서 함께 나눈 신념과 반하는 말이 나오는 날이 오고 말았다. 도리안은 스승에게 실망했으나 결코 놀라지 않았다. 스승의 부패는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타락의 늪 속에 잠식되는 스승을 지켜보기란 고역이었다. 귀를 닫아버려 이제는 무의미한 설득을 마지막으로 시도한 후 도리안은 그의 저택을 떠났다. 오른쪽 눈 밑의 새까만 점을 제외하곤 도리안의 몸은 여전히 깨끗했다.

 

기다림에 지친 도리안은 과거 방탕했던 일상으로 돌아갔다. 운명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팔을 뻗어 쟁취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하룻밤 상대를 매번 바꿔가며 운명을 찾아 헤맸다. 공교롭게도 도리안이 팔을 뻗은 종착지에는 그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리안은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하염없이 넘실대는 파도가 그를 비웃었다.

 

완벽한 몸에 허약한 마음이 서린 것은 할워드가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파부스 가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들의 마음을 바꿔야 했다. 신념을 깨트려가며 이름을 지켜야 하는가? 할워드는 양심에 물었고 양심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도리안은 우연히 아버지의 주변에서 불길한 피 냄새를 맡았다. 그 날로 도리안은 카리누스를 탈출했다. 스승과 혈육의 연이은 배신은 도리안이 남몰래 품은 꿈을 이어서 꾸게 할 기력까지 앗아갔다. 테빈터는 그에게 희망이 없는 땅이 되었다. 도리안은 제 분수를 파악하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2년 동안 카리누스를 제외한 테빈터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방황했다. 도리안의 세계가 테다스 남부까지 넓어진 건 스승의 아들이자 친우로부터 급하게 온 서신을 받은 후였다. 도리안이 떠난 후 이윽고 자취를 감춘 스승은 퍼렐던의 레드클리프에 있었다.

 

II

드클리프의 시간은 이상하게 흘렀다. 불은 이 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드클리프에 집결한 마법사들의 눈빛은 이단이라는 낙인으로 무기력해져 있었지만, 수가 틀리면 마을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불을 긴장하게 하는 것은 테빈터에서 온 마지스터 알렉시우스라는 남자였다. 마지스터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국으로부터 먼 걸음을 하여 남부 마법사들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까닭이 없었다. 불은 안드라스테의 전령과 대화 중인 마지스터의 얼굴을 오른쪽 눈에 새기며 그를 순식간에 제압할 수를 헤아렸다. 그의 계산은 마지스터와 동행한 그의 아들이 모종의 이유로 아버지 앞에서 어설픈 연기를 펼친 순간 멈췄고, 비로소 불은 다섯 번째 대재앙을 이겨낸 마을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전령에게 기댄 마지스터의 아들이 은밀히 건넨 쪽지를 따라 성당의 문을 열었더니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실력을 뽐내는 이국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마법을 쓰지 않고 지팡이로 물리적인 공격을 가해 악마를 영계로 돌려보냈다. 전령이 성당 내부의 균열을 닫자 그는 자신을 파부스 가의 도리안이라고 소개했다.

 

“조심하세요. 예쁜 것들은 언제나 최악이니까요.”

 

불의 굵은 저음에 퍼뜩 고개를 돌린 도리안의 시선이 불의 뿔에 닿았다. 여느 쿠나리의 것보다 큰 불의 뿔은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선은 금세 거대한 뿔에서 하나뿐인 눈으로 내려갔다. 도리안은 여유 있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의 친구는 의심이 많군요.”

 

입은 전령을 향했지만, 눈은 그대로 불에게 머물렀다. 불 역시 낯선 마법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불의 뾰족한 말을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들떠 보였다. 불은 구태여 의심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III

드클리프 사태는 일어나기도 전에 일단락이 되었다. 적어도 불의 입장에선 그러했다. 이국의 마법사와 전령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의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모른 채로 덮어두는 편이 나았다. 금세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마지스터 알렉시우스는 제 발로 헤이븐의 지하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고, 갈 곳을 잃은 남부의 마법사들은 심문회의 소속이 되었다. 심문회의 결성을 공표한 뒤 세상에 내놓는 첫 성과였다.

 

레드클리프에서 전령을 도운 알투스도 심문회에 남았다. 그렇게 벤-하스라스와 알투스는 동료가 되었다. 사람들은 둘을 목격할 때마다 전설이 된 그리폰이라도 보는 듯 가쁜 숨을 들이켜고 수군거렸다. 거대한 뿔이 달린 쿠나리와 무시무시한 마지스터가 서로에게 인사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악마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쪽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조차 쉽사리 믿지 못했다. 의심이 많은 쪽은 도리안이었다. 임무를 위해 함께 길을 나설 때면 도리안은 언제 불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지 떠보았다. 그럴 때마다 불은 특유의 재치와 우스꽝스러움을 가장한 허세로 그의 무해함을 증명하였다.

 

도리안의 경계는 단순히 적국의 첩자와 선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령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소개보다 균열을 닫는 원리부터 물었다. 도리안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갈증을 느끼는 부류였고 그것이 금단의 것이라면 더욱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단 그의 무궁한 호기심이 적국의 첩자에게까지 닿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도리안은 부정했고 의심했다. 적도 아군도 없는 세헤론에서 7년을 보냈던 첩자는 가문의 비호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련님의 속을 그리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보았다. 도리안을 보고 있자면 불에게도 상대의 것과 닮은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나선 쪽은 불이었다. 그는 도리안에게 갈증을 해갈해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였다.

 

IV

리안이 불의 대범한 제안을 받아들인 시점은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사이 하늘의 대균열은 닫혔고 심문회는 눈 덮인 산의 중턱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으며 전령은 심문관이 되었다.

 

모두가 취해 노래를 불러도 안심할 수 있는 안전한 밤에는 술이라 하면 빠지지 않는 이들로 전령의 쉼터가 북적였다. 불과 그의 돌격대가 전령의 쉼터에 발을 들였을 때 이미 도리안은 바텐더 앞에서 끔찍한 퍼렐던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불은 도리안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도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에게로 눈길을 흘렸다. 바 쪽에서 시선을 느낀 횟수가 세 번째가 되자 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돌격대의 야유를 뒤로하며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도리안의 잔은 반도 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열린 문 사이로 도리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불의 예상보다 조금 이르게 왔다.

 

“정말로 야만인처럼 문을 활짝 열어놨군.”

“황소의 쉼터에 온 걸 환영해, 빈트.”

 

도리안이 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팔만 등 뒤로 뻗어 천천히 문을 닫는 동안 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도리안은 불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입을 다물고 묘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이제보니 쉼터에 온 것이라기보다 함정에 빠진 것 같다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스스로로 발을 뺄 수 있는 헐거운 함정이지.”

“원한다면?”

“그래. 네가 어느 순간이든 이 모든 걸 멈추길 원하면 나는 그 즉시 멈출 거야. 혹시 정해둔 세이프워드가 있어?”

“진심으로 묻는 거야?”

“내 동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나를 가까스로 올려다보는 삶을 살고 있으면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알았어. 그래서 너의 세이프워드는 뭐지?”

“카토.”

“카토.”

“좋아. 명심해. 황소를 타는 건 네 생각보다 훨씬 감당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어.”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어떻게 시작하길 원하지?”

“날 벽에다 밀쳐줘.”

“아, 속박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유형이군.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어떤 식으로 섹스를 할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거야?”

“물론이지. 넌 아니야?”

 

도리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낮게 그르렁거렸다. 웃음을 터트린 불은 도리안의 볼에 손을 가져가 달래듯 한 번 쓸고 그의 뜻대로 어깨를 밀쳐 벽으로 몰아넣었다.

 

세 번의 사정 끝에 도리안과 불은 만족했다. 허덕이는 숨들이 잔잔해지자 도리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챙겼다. 불은 다정한 상대였다. 그의 옆자리에서 잠을 청해도 괜찮다는 달콤한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도리안은 누구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숨을 죽이고 불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날 밤 도리안은 신열에 시달렸다.

 

V

제 잠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도리안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잠기를 떼어내다 상체를 급히 일으켰다. 열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몸의 어딘가에 나타났을 이름을 찾기 위해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서려던 그는 시야에 들어온 오른쪽 손목을 왼손으로 조심히 감싸 쥐었다. 맥이 뛰는 자리 근처에 방금 잉크로 적은 듯 선명한 글자가 있었다. 성급히 손을 대다간 번지거나 지워질까 싶어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려보았다.

 

그가 그토록 그리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도리안은 이름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희망을 저버린 때에 불쑥 찾아온 이름은 도리안에게 혼란만 안겨주었다. 손목에 새겨진 글자는 도리안이 읽을 수 없는 글자였으나 그 글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쿠나리였다.

 

신중히 정황을 살펴보지 않아도 해괴한 글자가 가리키는 사람이 불이라는 건 명백했다. 당황한 도리안은 한동안 불을 피했다. 그가 꿈꿔왔던 운명의 상대가 불이라는 점이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리안은 불을 떠올리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했다. 문제는 불이 벤-하스라스 요원이었고 쿠나리라는 점이었다. 드디어 밝혀진 제 짝의 정체가 적의 첩자라고 하면 누구라도 당황스러울 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 도리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도리안, 나야.”

 

목소리의 주인은 불이었다.

 

“들어와.”

 

불을 보자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도리안은 어색하게 불에게서 등을 돌렸다. 불은 도리안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문 바로 근처에 서서 용건을 말했다.

 

“도리안. 네가 날 피하는 이유가 그날 밤 때문이라면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러 왔어. 네가 날 보는 게 불편하다면 섹스는 없었던 일로 쳐도 난 괜찮아.”

 

도리안은 그의 상황에만 정신이 팔려 불을 지난 며칠간 오해 속에 내버려 뒀다는 걸 깨달았다. 전신을 휘감는 죄책감에 불의 얼굴을 보기가 더 힘들었다.

 

“그런 게 아니야, 불.”

“블랙월마저 네가 날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니 부정은 하지 마.”

“널 피한 건 맞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

“아. 내 침대에 누워있는 네 실크 속옷 의미는 꽤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날 피하길래 실수인가 했지.”

“그건… 실수가 아니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런데 그 이유가 아니라면 왜 날 피한 거야? 정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도리안은 오른쪽 소매를 살짝 걷었다. 도리안의 손목을 본 불은 끝내 문장을 맺지 못했다. 불은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고 이름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불의 솔직한 반응에 도리안은 확신했다. 확신했지만, 상대의 입으로 들어야 했다. 듣고 싶었다.

 

“읽어줘, 불.”

“히스라드.”

“뭐?”

“네 손목엔 히스라드라고 쓰여 있어.”

“정확한 거야?”

 

답을 바라고자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불은 입을 열지 않고 도리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르르 쏟아진 실망을 다 주워 담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도 알아.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거. 하지만 그건…….”

 

네 이름이 아니잖아. 도리안은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말을 꾹 삼키며 불을 내보냈다.

 

VI

해가 풀린 뒤 둘은 다시 관계를 맺었다. 도리안은 이름에 구속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불이 아닌 또 다른 쿠나리가 나타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릴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졌다. 과연 이 이름이 진정 축복인지 회의마저 들었다. 도리안은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거는 것보다 현재를 택했다.

 

올레이의 궁정을 심문관의 입맛대로 요리한 직후, 쿤으로부터 동맹 제의가 왔다. 심문관은 동맹을 결성하고자 불과 함께 폭풍우 해안으로 떠났다. 도리안은 스카이홀드에 남았다. 불에게 특히 의미 있는 임무인 만큼 바로 그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심문관의 결정은 확고했다. 쿤과의 동맹을 약속하고자 하는 자리에 테빈터 출신 마법사가 동행하는 것은 악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충분히 이해 가는 바였다.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도리안은 종일 도서관에서 지내면서 창문 밖을 틈틈이 확인했다. 불이 떠난 지 며칠이 흘렀는지 잊은 채 관성적으로 창문 밖을 보다 스카이홀드 입구에 벌써 반가운 무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도리안은 습관처럼 뱉는 고국의 고풍스러운 욕설을 지껄이며 읽고 있던 책을 내팽개치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도리안은 무리에게 다가갈수록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스카이홀드를 나섰던 숫자보다 돌아온 숫자가 훨씬 적어 보였다. 심문관을 맞이하는 틈바구니에 끼인 후에야 어떤 숫자가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불은 있었지만 불의 돌격대가 보이지 않았다. 불은 누구와 말을 섞지 않고 전령의 쉼터로 곧장 향했다. 감히 거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멀어져가는 불의 뒷모습을 보던 도리안은 엄습하는 불안을 참지 못하고 심문관의 팔을 잡아챘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당장 이곳에서 나눌 대화는 아니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심문관.”

 

도리안이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심문관은 망설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도리안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쿤과의 동맹을 위해서는 돌격대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어요.”

 

VII

리안이 그 화제를 끌고 온건 몇 번째인지 더는 세지 않는 관계를 마치고 불과 침대에 나란히 누운 때였다. 그조차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을 골랐는지 알지 못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다 문득 흘러나온 말이었다.

 

“정말로 쿤과의 동맹이 돌격대보다 중요했나?”

 

불은 도리안의 기습에 침묵으로 수습한 후 짧게 대답했다.

 

“그들은 명예롭게 죽었어.”

“당장 내일이라도 깨질 수 있는 게 오늘의 동맹이야. 게다가 대륙을 수차례 공격한 적 있는 쿠나리는 더욱 믿을 수 없어. 넌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면서도 뿔나팔을 불지 않았어. 돌격대는 없으니 황소라는 이름에는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나와 돌격대에게 중요한 건 의무야.”

“내 질문의 답은 하지 않군.”

“내게서 무슨 말은 듣고 싶은 거야, 도리안? 후회한다는 말?”

“후회하나?”

“아니.”

 

불의 거침없는 답에 도리안은 몸을 일으켜 상기된 얼굴로 불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결국 너도 쿤을 위해서라면-”

“난 쿤을 위해서 쿤을 선택한 게 아니니까.”

“뭐?”

“나는 내 이름을 지켜야만 했어.”

 

불의 말은 수수께끼투성이였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공백은 오직 불만이 채울 수 있었으므로 도리안은 치솟은 화를 누그러트렸다. 불도 상체를 세워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도리안 앞에 왼쪽 팔을 내밀었다. 도리안은 불의 손목을 감고 있는 빨간 밧줄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도리안이 기억하기로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줄이었다.

 

“너도 짐작한지는 꽤 되었겠지. 이 밧줄 아래 뭐가 있는지 말이야.”

“이름?”

“그래, 이름. 너희 인간들은 창조주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쿤을 따르는 쿠나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성가시기만 한 글자일 뿐이지.”

“그런데 넌 그 이름을 여태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거야?”

“타마는 날 특별하게 여겼어. 최고의 전사로 키우려했지. 그래서 이 이름까지 이용해 날 시험에 들게 했어. 내 손목에 이름이 드러나자마자 타마가 그녀의 옷에서 줄을 끊고 그 줄로 내 손목을 세 번 감은 뒤 매듭을 지으며 말하더군. 쿤과 이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그 순간에 이름을 훼손하라고. 쿤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때, 그때야 쿠나리의 위대한 전사가 탄생할 것이라고 타마는 생각했던 거야.”

“뭐라고 적혀있어?”

 

도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나도 몰라. 확인해 본 적이 없어.”

“어째서?”

“이름을 보면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어질 것 같아 두려웠거든.”

“정말 실수로라도 네 왼쪽 손목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고?”

“그런 살육을 저지르는 것보다 손목을 보지 않고 매번 밧줄로 이름을 동여매는 수고를 하는 편이 훨씬 낫잖아.”

“그렇긴 한데 여전히 난 네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불이 도리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의 이름을 붙잡았다.

 

“불.”

“히스라드. 벤-하스라스가 내게 내려준 이름이야, 도리안.”

 

도리안은 잠시 자신이 영계에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꿈이라기엔 불의 붉어진 눈시울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지?”

“나도 놀랐었거든. 만약 다른 사람의 몸에 내 이름이 뜬다면 디 아이언 불일 것이라 생각했어.”

“잠깐, 그렇다면 네 이름을 지켜야만 했다는 말은…….”

 

마침내 도리안의 머릿속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고 이내 도리안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말을 잃어버렸다.

 

“네 손목을 본 날, 난 느낄 수 있었어, 도리안. 내 손목의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굳이 보지 않아도 확신이 들었지. 이름을 위해서 히스라드는 반드시 존재해야했어. 그래서 쿤을 선택한 거야. 다시 말하자면 나는 쿤을 선택한 게 아니야. 나는 너를, 우리를 선택한 거야. 카단.”

 

불의 단언과 함께 도리안은 무너졌다.

 

“날 위해 읽어줘.”

 

불이 다시 도리안에게 왼팔을 내주었다. 도리안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밧줄의 매듭을 풀었다.

 

그곳에 이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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