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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you need

 람을 약하게 만드는 데는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차갑고 추적추적한 비, 끈적한 피로, 혓바닥을 깔끄럽게 만드는 음식, 습기처럼 피부에 들러붙는 사소한 냉대와 희미한 거리낌. 작고 하찮고 별볼일 없는 것들. 하나씩이라면 그저 신경에 거슬리고 말 일이지만 엷은 안개같은 불쾌감의 층위가 조금씩 쌓이고 겹치다 보면 어느새 축축하게 젖고 지친 채 농무가 낀 깊은 숲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게 된다.

 물론 도리안은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음울한 수림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몇 가지 가지고 있었다. 술은 그 중 가장 쉽고 간편한 길이었다. 기진한 심장의 역할을 알콜이 대리해 혈액을 펌프질하면 피가 도는 것을 느끼는 동안에는 맥없이 까라지는 우울도 슬그머니 잊혀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의지가지를 찾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불운이었다.

 스카이홀드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홀은 어둡고 적막했다. 오늘따라 새벽까지 붙어있던 주정뱅이들도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졸고 있는 만취한 주당도 없었다. 심지어 바텐더인 캐벗조차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도리안은 입 속으로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바 뒤로 돌아가 선반을 뒤적거렸다. 남아 있는 거라곤 성의없이 주조되어 엉망으로 보관된 와인 두어 병이 전부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도리안은 혀를 찼다. 아직 그렇게 신새벽은 아닌데도 사람이 없었던 이유를 알 만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도대체 장사를 할 생각이 있는 건지 의문이다. 머릿속 한 켠으로는 아마도 지속되는 악천후에 스카이홀드로 들어오는 매입품 마차가 지연되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뭉근한 두통이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짓누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욕설을 내뱉으며 도리안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손에 들린 병을 딸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금 이런 식초같은 걸 먹어봐야 기분만 더 나빠지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고 말았다.

 도리안은 잠시 멍하니 빈 주점 안을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휑뎅그런 고요를 침범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제 피부 위를 직접 때리는 듯 아프게 느껴져 그는 무심코 두 팔을 감싸안았다. 감싸쥔 팔꿈치와 척추가 욱시근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3층까지 뚫려 있는 천장은 사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다.

 그 높이가 그를 망설이게 했다. 사실 올라가면 금방일 것을 안다. 가늠하는 거리와 실제의 거리 사이에서 도리안은 방황했다. 그가 계속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주점 3층으로 올라 그 옆에 있는 허름한 방 문을 열었을 때부터.

 처음에는 판단 착오로, 두 번째는 기억이 강렬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네 번째는. 이제 횟수를 헤아리는 것조차 의미 없어진 지금은. 열띤 밤은 즐거웠고 늘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쾌락은 분명하고 뚜렷한 형체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이라면 문제가 없었다. 그것 뿐만이라면.

 그러나 그 경계로 나아가면. 매달린 손을 놓고 얽혔던 몸을 풀고 모호하게 흐린 새벽 하늘 같은 순간을 맞닥뜨리면. 잠이 다 깨지 않아 몽롱한 눈 안에 비치는 푸른 그림자의 이름을 하염없이 골몰하게 되면.

 그러면 그는 한층 더 깊은 숲 속을 헤매게 된다. 불이 꺼지고 나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도리안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이 빗소리가 좀 더 질척하고 둔탁하게 바뀌었다. 진눈깨비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 것도 아니고 녹은 것도 아닌 결정이 처덕거리며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 가라앉은 실내 공기가 한층 싸늘하게 느껴졌다. 도리안은 한숨을 쉬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층계를 디디지는 못하고 잠시 멈춰선 채 기둥에 손을 짚었다. 습기 찬 목재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이 계단을 오르면 지금 당장 피부 밑으로 스미는 추위와 허전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무거웠다.

 방 문을 열었을 때 도리안은 등산이라도 한 듯 지쳐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들자 축축한 방 안에 비스듬히 놓인 침대가 보였다. 그것이 비어있지 않아 도리안은 흐릿한 안도감이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도리안?”

  “불.”

 늦은 시간인데 잠들어 있지 않았는지 의아함을 담은 그의 목소리는 깨끗했다. 도리안은 자신을 향해 성큼 걸어오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 시간에 무슨…”

 도리안이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아 끌어 내렸기 때문에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불은 말허리를 잇는 대신 도리안이 잡아당기는대로 순순히 몸을 숙여 주었다. 끊어진 말이 매달린 입술에 와닿는 입술이 메마르고 성급했다.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잠깐씩 입술이 떨어지는 사이사이 흐르는 숨이 뜨겁고 습했다. 목을 휘감았던 손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뒤로 가라는 듯 가슴을 꾹 밀었다. 그 손짓이 원하는 바가 뚜렷해 불은 도리안의 허리를 당겨 안고 입을 맞춘 채 침대로 향했다. 몇 발짝 뒷걸음질 치자 단단한 나무 틀이 다리에 걸렸다. 그대로 몸을 돌려 침대에 눕히자 아쉽다는 듯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도리안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목에 와닿는 뜨거운 숨결에 불은 잠깐 미소지었다가 곧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켰다. 눈을 내리감고 있던 도리안은 그 표정 변화를 보지 못했다.

 행위와 행위의 사이를 채우는 적당하다고 할 만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도리안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떴다. 불은 고개를 기울인 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 입술을 뗐지만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이봐. 너 열이 있잖아.”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자 온 몸에 저릿하게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아 도리안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열이 있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푹신한 곳에 몸을 누이자 기분 탓인가 싶었던 마디마디의 욱신거림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불쾌했다. 몸이 아파서 기분이 나쁜 건지 기분이 나빠서 몸이 아픈 건지,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았다. 도리안은 이마를 덮은 손을 짜증스럽게 쳐내며 말했다.

  “그래서 뭐, 그게 문제라도 되나?”

 불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 묵묵한 응시에 도리안은 왜인지 화가 치밀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또 그런 시선으로. 그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열락에 젖은 밤을 보내고 노곤해진 몸으로 잠들었다 깨면 새벽의 푸른 그림자 속에서 그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곤 했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처럼 모호하게, 탐욕도 연정도 아닌 무언가로 가만히. 그 눈은 무엇을 찾는 듯도 했고 이미 찾은 답을 조용히 검토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불분명하고 막막한 시선을 견딜 수 없어 여전히 잠에 든 척 돌아누웠던 날도 많았다.

 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을 바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날 지루하게 만들고 있잖아. 그냥 좋은 거나 하자고.”

 불은 웃지도 않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 보다가 그를 안아 일으켰다. 도리안은 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는 예상대로-혹은 바람대로-그의 옷을 벗기거나 하는 대신 한 손으로 그의 몸을 안은 채 침구를 정리했다. 깃털이 든 베개를 팡팡 두드려 부풀리고 구겨진 시트를 가다듬고 바닥에 반쯤 떨어진 이불을 주워 올린 후 그는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열 오른 숨을 내쉬던 도리안의 등과 허리 아래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대로 도리안을 안아올려 침대 가운데에 편안한 자세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허.”

눈을 동그랗게 떴던 도리안은 그가 목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 가슴께를 두어 번 토닥여주기까지 하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날 아주 환자 취급을 하는군. 그냥 돌아가는 게 낫겠어.”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불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침대로 내리누르는 손은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이 단단해 도리안은 다시 눕고 말았다.

  “뭐하는-”

  “내가 더 좋은 걸 알지.”

  “뭐라고?”

 불은 대꾸 없이 이마 위로 흐트러진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다시 이마를 스치는 선득한 손바닥에 도리안은 목을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았다. 와닿았다 금방 떨어지는 손길에 이상하게 가슴이 허전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가슴을 할퀴고 가는 듯한 감각이 싫어서 도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기다려.”

 명령도 으름장도 아닌 담백한 어조로 말하고 불은 미련 없이 일어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쿵쿵거리는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도리안은 다시 어처구니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는 재차 몸을 일으키려다 끄응 하는 신음 소리를 내고 자리에 누워 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열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릿한 두통은 어느새 현기증을 동반하고 있었고 시트에 쓸리기만 해도 피부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도리안은 어지러운 머리를 닫힌 문의 반대쪽으로 돌리고 입술을 질근 물었다 놓았다. 뚫린 천장으로 진눈깨비 떨어지는 소리만 툭툭, 질척하게 울렸다. 도리안은 몸을 웅크렸다. 추웠다.

 얼마가 지났을지, 아주 잠깐 같기도 하고 영원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리안은 웅크린 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커다랗고 무거운 것이 바닥을 딛는 소리, 삐걱이는 나무 계단 소리, 경첩에 매달린 문이 덜커덕 열렸다 탁 닫히는 소리, 바닥에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 아주 가까운 곳에서 멎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

  “도리안.”

 자신을, 부르는 소리.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 눈을 감아도 그 녹색 외눈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목소리. 도리안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손에 무언가를 든 불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자.”

 그리고 그가 내미는 것은 머그잔에 든 우유였다. 데워서 따뜻하게 김이 올라오는. 도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환자 취급도 모자라서 이건 뭐지, 다섯 살짜리 어린애 취급인가? 아주 고루고루 하는군.”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도리안은 불을 쏘아보았다. 맹렬한 시선을 불은 아랑곳않고 맞받았다. 함께 성내지도 채근하지도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일방만 사나워 눈싸움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눈맞춤이 오래 이어지자 불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난 아픈 사람이랑 하는 취미는 없어. 내가 아프게 만드는 걸 좋아하지. 마셔.”

 그런 식으로 말하니 왈칵 화를 내려다가도 맥이 빠진다. 도리안은 잠깐 질렸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내저으며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잔을 손에 쥐자 손끝에서부터 저릿하게 온기가 올라왔다. 도리안은 잠시 말없이 잔 속을 내려다 보았다. 약하게 꿀 향기가 났다.

  “이건…”

 이건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그는 말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관절을 아프게 하던 열기가 뜨겁게, 목까지 타고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끊어진 말을 잇는 대신 그는 잠자코 컵에 든 것을 마셨다. 우유는 입을 데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게 따뜻했다. 조금씩 조금씩, 달고 따뜻한 것을 삼킬 때마다 피부 밑으로 스몄던 냉기가 흐려진다. 목을 타고 넘어가 몸의 중심에서 말단까지 퍼지는 온기가 달가운 듯도 했고 어쩐지 서러운 듯도 해 도리안은 아주 천천히 우유를 마셨다. 불은 도리안의 그런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잔이 비었을 때 불은 빈 잔을 받아 곁에 치워 두고 도리안을 다시 자리에 눕혔다. 이번에는 순순히 자리에 누운 채 도리안은 잠시 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촛불 두어 개만 켜져 있는 방은 어둑신했고 그의 얼굴은 침침하게 일렁이는 그림자에 잠겨 명확하지 않았다. 도리안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가 바랐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저 텅 비어 허전한 두 팔 사이를 메울 단단한 형체를. 잠깐이나마 가슴 속에서 부글거리는 진창을 없었던 것처럼 잊게 만들 뜨겁고 맹목적인 쾌락을. 하룻밤 더 연장되는 의도된 실수를. 그저 그거면 됐는데.

 그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게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방 문을 열고 눈을 마주친 순간 이미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는 바란 적도 요구한 적도 없는 것을 떠넘기고.

  “해달라고 한 적 없어.”

  “나도 알아.”

 어지러운 생각이 맥락도 없이 입술 위로 튀어나갔지만 그는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대꾸했다. 정말로 아는 건지 그런 척만 하는 건지, 뭘 안다는 건지, 도리안은 이유 없이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열이 눈가로, 목덜미로, 코끝으로 퍼졌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위로 추적추적, 얼다 만 눈 소리가 쌓였다. 부서진 천장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촛불을 가늘게 흔들었다. 어둠이 물처럼 일렁이고 그는 아무런 말이 없다. 입맞추지도 안거나 다독여주지도 않는다. 다만 의자에 앉은 그의 무릎만은 침대에 닿을 듯 가까웠다.

 도리안은 천장을 바로 보고 누운 채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가 있는 쪽으로도 반대쪽으로도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모른 체 하고, 동시에 혼란스럽게 헤매는 거리. 의자와 침대 사이의 안타까울 정도의 간격. 그것이 왜 이토록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소란스럽게 만드는지. 눈 먼 사람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게 허공을 더듬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애써 모른체 하기에 그의 지성은 지나치게 자존심이 높았다. 이것은 춤과 춤 사이의 막간이다. 우리는 잠깐 즐거운 춤을 추었고 이제 다음 음악이 흐르기 전 침묵에 싸인 홀에 서 있다. 눈을 마주 하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어느 쪽도 먼저 다가서지 않은 채.

 먼저 손이 내밀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모르는 체 이끌려갈 수 있었을 텐데. 혹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미련 없이 돌아 서서 떠나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여 주지 않았다. 선택은 결국 자신에게 있었다.

 지금 한 발짝 내딛으면 아주 오래 이어질 춤을 추게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이없이, 무참하게 거절당해 빈 홀에 홀로 남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도 두려웠다. 두려워서, 새벽녘 그의 눈에 비치던 푸른 그림자의 함의를 애타게 찾아 헤매게 된다. 따뜻한 컵을 손에 쥐고 꿀과 우유의 향기 너머를 초조하게 탐색하게 된다. 그가 선 경계를, 위치를, 하염없이 확인하고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도리안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머리가 몽롱했다. 그러나 아까처럼 춥지는 않았다. 몸 속에 따뜻한 액체가 머무르는 동안은 조금 괜찮을 것 같았다. 잔을 본 순간에는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었지만, 불의 생각대로, 유효한 처방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그 사실에 어쩐지 또 조금 분한 기분이 되었지만 괜한 신경질을 부릴 기력도 없었다. 눈꺼풀 위로 졸음이 산사태처럼 쏟아졌다.

 압사당하듯 잠 속으로 빠져드는 그의 곁에 불은 여전히 움직이는 기색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졸음에 까마득한 머릿속에 묵묵한 실루엣이 어지럽게 오갔다. 그 사이로 문득 희미한 예감 같은 것이 섞였다. 내일, 내일 아침이면.

 그가 자리를 지킬지 떠나버릴지 어쩌면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내일 아침이면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밤도 새벽도 아닌 시간에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나면. 혹은 그의 빈 자리를 확인하고 나면.

 그러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다가서든 돌아서든 어느 쪽이든.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막간을 끝내고 다음 음악이 흐르기 전까지, 내일 아침이면.

 잠에 취한 터무니없는 확신이 다른 모든 생각들을 침묵시키는 것을 느끼며 도리안은 잠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그의 숨소리가 골라진 것을 확인하고 불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진눈깨비가 눈이 되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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